박규수(朴珪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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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사전 편찬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생년1807
졸년1877
관직조선 말기의 문신
관직개화사상가
집필자장영숙

본문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환재(桓齋)와 환재(瓛齋), 또는 환재거사(瓛齋居士)로 다양하게 쓰인다. 북학파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다. 현령인 아버지 박종채(朴宗采)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였다. 7세 때 논어를 읽고 시를 지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하였다. 청년시절, 두 살 연하의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세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자, 20여년을 칩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나이 41세가 되던 1848년, 증광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사헌부 장령과 동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사태수습을 위한 안핵사에 임명되어 민란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였다. 이는 국내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863년에 익종의 뒤를 계승한 고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익종)와의 친분을 계기로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고종의 강학스승 역할도 하였다. 이어서 사헌부대사헌 ‧ 홍문관제학 ‧ 이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1866년에 평안도관찰사, 1869년에는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제학으로 있던 중 1872년 진하사의 정사로서 서장관 강문형(姜文馨), 역관 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하고 중국에 다녀왔다. 귀국 후 1873년 5월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12월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처럼 화려한 관직생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박규수는 외치와 내치 모두에 능한 실무정치가였다. 그는 두 번의 중국사행 경험을 통해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는 1861년 연행사절의 부사로 중국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 직후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박규수는 이를 보며 국제정세의 실상을 직시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1872년의 사행 경험을 통해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을 목격하면서 개국과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가 첫 번째로 청나라를 방문할 당시에는 집권층 대다수가 위정척사적인 대외인식의 바탕 위에 있었다. 이는 곧 올바른 것을 지켜내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사(邪)의 내용과 대상은 역사적 환경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때에 따라 불교 ‧ 도교 ‧ 천주교를 비롯하여 주자학이 아닌 모든 사상과 서양문물이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사회신분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배척해야 할 사악한 대상이 되었다. 박규수 역시 시대의 대세였던 위정척사적인 사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청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목도하면서, 서양문명의 우월성 보다 그들의 침략성을 더 우려하는 자세도 가지고 있었다.
1866년 평안감사로 재직할 때에는 대동강에 불법으로 침입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화공으로 격침시키면서, 서양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이 일로 그는 조선의 무공을 빛냈다는 이유로 임금으로부터 은전을 받기도 하였다. 박규수는 중국이 서양의 침략을 당하는 것에 대해 “서양 오랑캐가 중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성스러운 가르침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 “그들의 천주교가 청에 전해져 백성을 현혹시키는 것은 청이 정학을 천명하지 못한 소치”로 보았다. 당시 대부분의 집권관료들처럼 유교 윤리를 밝혀 양이(洋夷)를 감화시키면, 함부로 조선을 공략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는 박규수가 쇄국정책을 주도하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치하의 사회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제너럴셔먼호사건과 이를 구실로 미국이 무력 개국을 시도하여 일으킨 1871년의 신미양요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공명정대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 대해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다고 일컬어지고 분쟁의 해결을 잘하며, 또 6주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이 없다고 하니, 우리가 먼저 수교 맺기를 힘쓴다면 고립되는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집권층과는 유리되는 대외인식이었다. 때문에 박규수는 드러내 놓고 자기주장을 펴지는 못한 채, 무력으로 맞대응을 했던 것이다.
신미양요를 겪은 후 미국에 대한 자문을 내면서 “저쪽이 호의로 오면 우리도 호의로 대하고, 저쪽이 예로 대하면 우리도 예로 대접할 것이다. 이는 곧 인정이 그런 것이며 나라간의 통례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국가의 공식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 것이었다. 박규수 휘하에서 공부했던 문인 김윤식(金允植)조차도 “문호를 닫고 수호를 물리치는 일은 선생의 뜻이 아니었고 시세부득이한 것이었다” 라며 박규수의 개방적 사고를 평가한 바 있다.
신미양요를 겪은 다음해인 1872년 진하겸사은사로 청에 다녀온 후로는 국제문제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청에 들어와 있던 서양오랑캐의 동정에 대해 고종에게 세세한 보고를 올렸다. 아울러 청이 양무운동을 일으킨 성과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양이들이 더 이상 청에게서 실리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즉, 청이 처음에는 서양의 화포와 화륜선 등을 구입해 오다가 점차 그 기술을 습득하고 모방하여 자력으로 이를 제조해 냄으로써, 서양은 더 이상 청으로부터 이익을 취하지 못한다는 점을 설파하였다.
결국 박규수는 두 차례의 청나라 방문을 통해 서구제국주의의 무력 앞에 동요하고 있는 청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이나 영국 ‧ 미국 ‧ 프랑스 등의 국제관계를 보는 안목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세계정세를 춘추시대와 같은 약육강식 상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도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국강병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873년 12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후, 조선 조정에서는 대외관계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는 바로 일본이 왕정복고를 통고해온 서계 문제였다. 1875년 2월에 일본이 보내온 서계는 종전의 서계격식과 달리 조선국왕에 대해 일본 스스로 ‘황(皇)’과 ‘칙(勅)’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국을 향해서 ‘대일본(大日本)’ 등으로 일본을 존대하는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서계가 외교격식에 어긋나고, 일본이 황제를 참칭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무뢰함을 이유로 수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는 이미 1868년 대원군 집권 당시에도 1차로 보내져 왔던 것을 또다시 거부한 것이었다.
박규수는 1875년 5월 서계 문제를 둘러싼 조정회의에서 “일본이 그들의 황실을 높여 ‘칙(勅)’, ‘경사(京師)’ 등의 말을 사용하고 조선에 대해서는 ‘귀국(貴國)’이라며 낮추어 호칭하는 등의 일은 그들 나름대로의 자존적 표현일 뿐, 이를 문제 삼아 국교를 단절하는 것은 잘못된 일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 내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해 왜와 서양은 다 같은 오랑캐(倭洋一體)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규수의 주장은 쉽게 수용되기 어려웠다. 다만 일본과의 수교를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는 박규수의 주장은 전통적인 위정척사사상에서 벗어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에 박규수는 대원군(大院君)에게 “만약 저들이 포성을 한번 발하게 되면 이후 비록 서계를 접수하고자 하여도 이미 때가 늦어 나라의 치욕을 당할 것”임을 운운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왜와 서양이 한 편인 상황에서 일본과의 수호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약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력행사의 구실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일본이 보낸 두 번째의 서계에 대해서는 수용을 주장하면서 쇄국일변도의 정책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는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양이의 것이라도 자주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처럼 박규수는 일본과의 국교회복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지만,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그만큼 조정의 대세는 여전히 척화(斥和)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계 처리가 늦어지자 8월말 경에는 일본인이 영종진(永宗鎭)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포를 쏘아대는 등 각종 소요를 일으켰다. 일본은 운양호(雲揚號)를 몰고 와 도발을 일으키는 속에서 운양호가 피격되자, 이를 구실로 1875년 12월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위협해왔다. 일본의 요구는 조선과 새로운 통상조약을 체결하자는데 있었다. 즉 국교수립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무력함대를 몰고 와 도발을 일으키자, 박규수 역시 일본이 병선(兵船)과 함께 수호를 명분으로 사자(使者)를 보낸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는 “조선이 일본에 대해 선제공격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뜻밖의 사태가 생기면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도 암시하였다. 즉 무력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인 통상개국론을 주장하였다.
강화도 전투에서 무력의 열세로 일본에 밀리게 되자 전장생활을 오래 경험하였던 신헌(申櫶)과 강위(姜瑋) 등은 통상조약 체결을 주장하고 나섰다. 우의정이었던 박규수 역시 고종을 설득하여 이듬해 2월, 문호개방으로 정책을 선회하게 함으로써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처럼 문호개방으로 가는 길에는 일찌감치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이의 수용과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인식한 박규수와 같은 인물의 역할이 있었다.
박규수는 일찍부터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金允植) ‧ 김옥균(金玉均) ‧ 유길준(兪吉濬)‧박영효(朴泳孝) 등 젊은 양반자제들을 불러 모아 『연암집(燕巖集)』,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을 비롯해,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과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책자와 사상들을 공부하였다. 이를 통해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을 함께 연구하였다. 그 결과 그의 밑에서 수학하던 인물 가운데서 이후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박규수는 이미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저작물을 통하여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尹宗儀) ‧ 남병철(南秉哲) ‧ 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일류학자와의 학문적 교유를 통하여 실학적 학문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의 바탕 위에서 개화지식인을 배출해 냈기 때문에 박규수를 흔히 북학과 개화를 연결시킨 중심인물로 간주한다.
저서로는 『환재집(瓛齋集)』과 『수계(繡啓)』가 있고, 편저로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